THE JOURNAL

유태오는 2002년 여름을 뉴욕에서 보냈다. 삼 개월 코스의 연기 수업이 끝나는 대로 독일로 돌아갈 계획으로. 그는 마음을 바꾼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에게 전화했고, ‘죄송해요. 하지만 이게 내가 선택한 삶이에요.’라 말했다. 그렇게 유태오는 물리 치료사가 되려 했던 지난 삶을 전복하고, 연기의 세계로 더 깊숙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걸어들어갔다.
그가 태어나기 전 유태오의 부모님은 독일 쾰른의 조용한 교외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광부로 어머니는 간호사로서 일자리를 구한 것이다. 이민 1세대 한국인 가정에서 배우의 꿈을 키우는 것은 꽤나 이상한 일이었다고. “농구 선수의 꿈을 키우던 남자아이라고 하기에는 특이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배우고, 왕가위와 이안의 영화를 찾아봤거든요. 영화의 문법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어쩌면 예술을 통해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찾은 것 같아요. 스크린 속 이질감과 외로움의 정서는 제게 낯설지 않았죠.”


2002년 여름 유태오는 리 스트라스버그 연기 학교에서 알 파치노 등 전설적인 배우와 협업한 어마 샌드리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수업을 통해 본인 스스로를 밀도 있게 이해하게 됐으며, 배우로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 또한 훨씬 더 흥미롭게 느끼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뉴욕을 떠나기로 했던 삼 개월의 기간이 훌쩍 지난 후에도 그는 뉴욕에서 배우로서의 기본기를 착실히 쌓아갔고, 2004년 봄 연기 학교를 졸업했다.
최근 유태오는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해성을 연기했다. 어린 시절 뉴욕으로 이민한 한국계 미국인 나영(그레타 리)이 24년 만에 소꿉친구 해성과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물리적인 이유로 헤어진 두 사람의 애틋한 인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튜디오 A24와 CJ ENM이 공동 투자 배급한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로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임에도 전 세계 유수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며 놀라운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유태오는 한국 배우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상(BAFTA) 남우주연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영화는 올해 3월 열리는 제96회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최종 후보이다.

영화 속 해성과 나영은 뉴욕과 한국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뉴욕으로 떠난 나영은 ‘노라’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작가가 되었고, 미국인 남편을 두고 있다. 한국에 남은 해성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해성은 과묵한 캐릭터예요. 감정에 있어서는 물론 말투부터 몸동작까지 어딘가 억압된 부분이 있죠. 한국 사회에 여전히 깊게 뿌리내린 유교적 남성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어요.” 유태오가 말한다. “해성에 비해 저는 훨씬 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 잦았던 만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처럼 멜랑콜리한 정서가 한구석에 남아있죠.” 그가 연기한 해성은 믿을 법한 창조물보다는 잊고 지낸 어제의 그림자에 가깝다.


전혀 다르고도 조금은 비슷한 유태오의 ‘해성’은 비평가의 찬사를 받기 충분했다. NPR은 그의 연기가 ‘조용하게 마음을 울린다’고 평가했고, Vanity Fair는 ‘미묘하고 인간적’인 그의 캐릭터 해석을 칭찬했다. 하지만 유태오에게 <패스트 라이브즈>가 가져다준 기쁨은 미디어의 열광적인 호응 그 이상이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준 울림이 더 커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눈물이 났어요. 함께한 모두가 알고 있었죠. 지금 손안에 들린 이 종이 더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특별한 것인지 말이에요.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이런 작품이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영어로는 ‘Vulnerability’라고 하는데, 아무런 보호구도 없이 자신의 가장 취약하고 연약한 내면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얻게 되는 용기와 진솔함이 담겨 있었달까요. 서로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또 그 과정에 각자의 삶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에너지가 있었어요. <패스트 라이브즈>는 제게 하나의 완벽한 폭풍이었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눈물이 났어요. 우리 모두의 인생에 이런 작품이 필요한 시점이었죠.”
유태오는 2007년 아내인 아티스트 니키 리를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 한국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다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왔다. 러시아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레토>의 주연 배우로서 2018년 칸 영화제에 입성한 후로 오랜만의 국제적 스포트라이트인 셈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그는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각종 갈라쇼와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알아봐 주시더라고요. 연기에 대해서 진득하게 이야기 나누기는 어려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페드로 파스칼과 키아누 리브스를 만나서 각자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눴죠.” 유태오는 겸손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아 물론, 교류라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팬심이 더 컸어요.”

그는 다시 서울에 있다. 생동감 넘치는 도시의 리듬에 맞춰 몸을 다시금 조율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선 북한산을 오르기도 하고, 시간을 내서 새로 도착한 시나리오를 읽는다. 넷플릭스 스릴러 시리즈인 <더 리크루트>의 두 번째 시즌에 캐스팅된 만큼 머지않아 해외로 나갈 예정이지만, 설만큼은 한국에서 보낼 생각이라고. “가족들과 윷놀이하거나 트로트를 듣고, 갈비찜이나 김밥을 먹으면서 오붓하게 보내고 싶거든요.”
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그가 첫 배역을 얻기 전 무명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 봤어요. 70대의 가난한 배우로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이죠. 너무 배고프지 않다면 늦은 밤 공원을 돌아다니며 데이트하는 커플들에게 즉흥 공연을 보여줬을 거예요. 물론 돈은 받지는 않고요. 그저 관객이 되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에 작은 선물을 주지 않았을까 하죠.”
“역설적이지만 니힐리즘에서 얻는 용기가 있어요. 시스템이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순응하며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하다가 죽는 편이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무명 시절 그가 예상했던 미래와 현재는 제법 다른 모습이다. 유태오의 리얼 라이프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그는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패스트 라이브즈> 프리미어가 열린 날을 기억한다. 쾰른에서 4시간 거리였던 이곳에 그의 가족들도 함께 참석했다. 석 달만 있기로 했던 뉴욕에서 그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배우로서의 꿈을 털어놨던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이다. 유태오는 세계 최고의 영화인이 모이는 베를린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았다. 파파라치들의 플래시 세례와 열성적인 관객들에 둘러싸인 채로 그는 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패스트 라이브즈>는 올해 3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